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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근대 교량의 효시, 한강철교 ①

보도일자 2011-02-28

보도기관 건설경제

경인철도 부설과 함께 1900년에 준공된 한강철교 건설은 우리나라 교통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사건일 수밖에 없다. 기차와 철도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도입됐다는 역사적 의미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서구의 근대적 신기술을 도입한 교량이 이땅 한반도에 처음으로 건설됐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강을 비롯한 전국의 큰 강을 건너는 다리는 없었다. 임금이 한강을 건널 때 임시로 가설하는 주교(舟橋)가 가장 길고 큰 다리였다.

청계산 사냥길을 유난히 즐겼던 재위 말년의 연산군은 무려 800척의 민선을 징발했다고 한다. “강원도 땔감장수 통배 뺏기고 울고 가면, 전라도 알곡 장사 황포 뺏기고 울고 가면, 마포 객주들 발 뻗고 울고, 노들나루 색주가들 머리 잘라 판다”는 배다리 원가(怨歌)가 번질 만도 했다. 바로 그 배다리 놓던 자리 노량에 철교 교각을 세웠다.

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량 건설

한강철교 건설 당시 한강의 만조 때 수면은 폭이 426m 정도였고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49m 남짓이었다. 그리고 평상시 수면 폭은 109m 정도였다. 철교 교각은 강안 양쪽의 교대(橋臺) 외에 모두 9개를 세웠다. 양 교대 사이의 거리는 628.9m였다. 강 남쪽 교대는 자연 암반 위에 화강석을 쌓았고, 강 북쪽 교대는 자갈층 위에 콘크리트로 시설했다. 교각의 수면 위로 드러나는 부분은 모두 화강석과 벽돌을 사용했으며, 수면 아래 교각 기초 부분은 그 위치에 따라 공법을 달리했다. 즉 남쪽부터 시작하여 제1호에서 4호 교각까지는 타원형 우물통(장축 9mㆍ단축 4.8m)을 사용했으며, 수심이 깊은 강 중앙 부분의 제5호부터 8호 교각은 우물통과 같은 크기의 철제 함을 사용했다. 그리고 제9호 교각은 자갈층 속으로 시판공(矢板工)을 내려 박아 콘크리트로 기초를 다졌다. 평상시 수면을 기준으로 수면 위 교각 높이는 11.2m였고, 수면 아래 잠기는 부분은 제9호가 3m로 가장 짧고 제5호의 12.8m가 가장 길었다.

상부 구조는 강재 트러스(truss) 형식을 취했으며, 구형(構桁ㆍgirder)은 미국제 단선 플래트형 10연(連)을 설치했다. 형 하나의 길이는 61m, 폭은 평균 5.1m, 높이는 11.3m였다. 10연 이후 용산 쪽 구간은 교각을 세우지 않고 제방을 쌓아 선로를 설치했으며, 홍수에 대비해 피일교(避溢橋)를 가설했다. 당초 모스(Morse, J. R.)가 부설권을 계약할 때는 철로 오른쪽에 폭 1.22m의 인도를 가설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사업을 인수한 뒤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이 조건을 철회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CERIK)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