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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시론] ‘甲’옷을 벗어던지자

보도일자 2013-05-10

보도기관 건설경제

얼마 전 한 대기업 임원이 항공기 승무원을 폭행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임원은 결국 사직을 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일터와 명예를 다 잃고 만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라면상무’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애초에 자리 문제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사건은 “왜 내 옆자리를 안 비웠느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석에 탄 상무는 자리에서부터 제대로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다. 항공사 직원에게 가장 무서운 건 ‘자리’라는 설명의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아직도 국회의원 몇 사람이 같은 날 지방으로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담당자들은 자리 배치 문제로 초비상이 걸린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어느 중소업체 회장이 호텔 현관 서비스 지배인을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공무를 위한 임시 주차장에 수십 분 동안 주차한 차량을 이동 주차해 달라고 요구하자 회장이 폭언과 폭행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고급 외제차를 탄 회장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요구가 심한 불쾌감을 주었던 것 같다. 자리와 관련하여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도대체 자리가 무엇이길래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인격을 모욕당한 것처럼 과도한 불쾌감을 표출하는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대기업 상무와 중소업체 회장은 회사 안팎에서 엄청난 ‘자리’의 위력을 경험해왔을 것이다. 상석과 말석의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 몸으로 익혀왔을 것이다. 아랫자리에서 윗사람을 깍듯하게 모셔왔듯이 높은 자리에 앉아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의 법칙을 체험하신 분들이 기내에서 또는 주차장에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그 불쾌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자리는 단지 상징일 뿐이다. 자리를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데는 어떤 숨겨진 기제가 있을 것이다.

 승무원 폭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증폭된 후 해고 임원이 소속된 그룹의 워크숍에서, 한 고위 임원이 행한 말을 우연히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창피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갑’ 노릇만 하다가 언젠가 분명히 터질 일이었다. 차라리 잘 터졌다. 우리나라 힘 있는 산업체의 임원, 부장, 직원에게 우리가 교보재를 제공했으니 이제 정신 차려야 한다.”

 그는 이번 사건을 개인의 인격과 성품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개별 기업에 국한된 문제로도 보지 않았다. 그는 이번 사건을 우리 산업계의 고질적인 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자리 문제의 본질은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뿌리 깊은 ‘갑을의식’ 문화이다. ‘갑’의 위치를 무슨 벼슬처럼 높은 자리로 인식하는 우리의 문화가 이런 일련의 사건을 만든 것이다. 직장과 일터에서 체화된 갑을의식이 자제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발휘되고 만 것이다. 특별한 이해 관계도 없는 항공기 좌석과 주차장에서조차 갑이 되고자 한다면 직장 내에서 또는 거래관계에서 이들이 보여줄 행태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매사에 목에 힘을 주고 대접받으려는 이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탈권위주의와 지식정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이들이야말로 꼴불견 대상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갑’임과 동시에 ‘을’이다. 물론 경력을 쌓고 큰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갑’으로 변신할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정점에 서지 않는 한 우리는 한평생 ‘갑’이면서 동시에 ‘을’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특별한 문제라고 말할 수 없다. 관계를 통하여 살아가는 인간 삶에서 어쩌면 갑을관계는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갑을관계에서 우리들이 표출하는 문화적 행태가 문제일 뿐이다. 갑이 부당한 횡포를 부리면 을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고,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오른 갑은 보란 듯이 을에게 막말을 퍼붓는 그런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먹이사슬처럼 이런 생각과 행동이 만연한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백화점 점원이 자살하고, 본사 직원이 나이 많은 대리점 점주에게 막말을 퍼붓는 등 갑의 횡포를 알리는 뉴스가 연일 들려오고 있다. 갑을문화가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고질적 병폐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접어두고서라도 갑을의식은 근절되어야 하는 문화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양극화 문제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높은 위치에 있는 분, 힘 있는 분들이 쓸데없고 불필요한 갑을의식만 자제한다 해도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통합될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접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몸에 무겁게 걸치고 있는 ‘甲’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져 버리자. ‘甲’옷을 벗고 가볍게 비상하는 새들처럼 ‘乙’의 마음자세를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