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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강자의 이익이 정의

보도일자 2019-04-29

보도기관 매일경제

대학 2학년 때 정치사상사 수업 교재가 2400여 년 전에 플라톤이 쓴 `국가`였다. 당시는 1980년대 초반의 민주화운동이 치열한 때라 그랬는지 도덕적 정의감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충만했던 것 같다. 현실 옹호적인 발언이 싫었고 규범적인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 국가가 어떤 것인지도 관심을 끌었다.

플라톤의 `국가`는 유명한 소피스트였던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정의(正義)`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단언했다. 통치자들은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정의로 포장하는데, 사실 그 법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 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법이나 탈법을 저지르는 부정한 자들로 낙인찍어 처벌한다. 따라서 통치자가 바뀌건 말건, 언제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현실주의적 입장이다. 도덕적·규범적 입장에서 옳다, 그르다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정치현실주의자들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이 규범적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용되기 어렵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반론은 다소 생뚱맞고,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강자인 통치자들도 실수할 때가 있고 자기 이익에 반하는 입법을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강자의 이익이 정의냐고 반문한다. 물론 트라시마코스도 통치자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통치자가 제대로 제 역할을 하는 한, 좀처럼 그런 실수를 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언제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최근 사법부의 고위 법관 인선 등을 비롯한 정치적 논란을 보고 2400여 년 전 논란이 됐던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다. 아마도 20대 대학생이라면 정의감 넘치고 `불만에 가득 찬 소크라테스`처럼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현실주의자들은 그것이 정치 현실이라는 이유로 수긍할 것 같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정의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