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와 쓰나미
보도일자 2011-04-29
보도기관 건설경제
“1714년 7월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져 여행객 다섯 명이 다리 아래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손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신앙심이 깊고 형이상학적 문제로 고민하는 주니퍼 수사는 다리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는 곧바로 “왜 이런 일이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일어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이 사고가 순수한 신의 행위라고 확신하며 그들의 인생 행적을 알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6년간에 걸친 그의 추적 작업은 천주교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책과 저자 모두 화형에 처해진다.
소설 속에는 다섯 명의 삶에 대한 추적 조사 내용이 실려 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시사해주고 있다. 다리를 건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문제와 딜레마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고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매 순간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작가는 다섯 명의 희생자를 통해 우리 자신의 보편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11일 동일본을 휩쓸어버린 쓰나미의 희생자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그날의 영상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부 맹신주의자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들의 희생과 아픔이 곧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확신한다. 일제강압기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성금 행렬에 발벗고 나서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보편적 인류애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측은지심이 있는데 다만 그것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곧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곧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은 그런 충동을 만들어낸 사랑에게 돌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이는 세계무역센터 희생자 추도식에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가 인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전 문제로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피해지역에서는 이재민을 위한 집을 짓고 끊어진 도로와 다리를 잇는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건설기업들이 이 비극을 극복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쓰나미의 비극과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사랑과 건설의 참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이 주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극복의 동력은 바로 사랑일 것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 바로 건설이다. 그렇다면 건설의 위대한 에너지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설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건설이 가장 오래된 산업으로 존재해 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건설은 자연환경 탓이든 아니면 어리석은 인간들 간의 다툼 때문이든 그로부터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왔다.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인간 삶의 터전을 창조하려는 건설인들의 유전자에는 인간애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 건설인과 건설기업들은 자주 이 사랑의 의미를 망각하고 만다. 사랑의 의미는 사라지고 시장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의식하지 않으면 기업은 생존과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때론 그 의식이 지나쳐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기도 한다.
요즘 건설기업들이 처한 위기를 보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시장에서 살아남고 승리하려는 집착이 탐욕과 과잉을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건설산업은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동시에 국민들로부터도 그리 따사롭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까? 건설의 위대한 에너지인 사랑의 의미를 떠올리고 그것을 토대로 기업 스스로의 사명과 비전을 챙겨볼 것을 권유한다.
“건설은 시장이기 이전에 사랑이다”라고. “그래서 건설은 위대하고, 영원하다.” 이 땅의 건설인들에게 외치고 싶다.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손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신앙심이 깊고 형이상학적 문제로 고민하는 주니퍼 수사는 다리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는 곧바로 “왜 이런 일이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일어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이 사고가 순수한 신의 행위라고 확신하며 그들의 인생 행적을 알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6년간에 걸친 그의 추적 작업은 천주교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책과 저자 모두 화형에 처해진다.
소설 속에는 다섯 명의 삶에 대한 추적 조사 내용이 실려 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시사해주고 있다. 다리를 건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문제와 딜레마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고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매 순간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작가는 다섯 명의 희생자를 통해 우리 자신의 보편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11일 동일본을 휩쓸어버린 쓰나미의 희생자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그날의 영상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부 맹신주의자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들의 희생과 아픔이 곧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확신한다. 일제강압기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성금 행렬에 발벗고 나서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보편적 인류애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측은지심이 있는데 다만 그것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곧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곧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은 그런 충동을 만들어낸 사랑에게 돌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이는 세계무역센터 희생자 추도식에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가 인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전 문제로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피해지역에서는 이재민을 위한 집을 짓고 끊어진 도로와 다리를 잇는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건설기업들이 이 비극을 극복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쓰나미의 비극과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사랑과 건설의 참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이 주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극복의 동력은 바로 사랑일 것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 바로 건설이다. 그렇다면 건설의 위대한 에너지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설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건설이 가장 오래된 산업으로 존재해 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건설은 자연환경 탓이든 아니면 어리석은 인간들 간의 다툼 때문이든 그로부터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왔다.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인간 삶의 터전을 창조하려는 건설인들의 유전자에는 인간애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 건설인과 건설기업들은 자주 이 사랑의 의미를 망각하고 만다. 사랑의 의미는 사라지고 시장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의식하지 않으면 기업은 생존과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때론 그 의식이 지나쳐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기도 한다.
요즘 건설기업들이 처한 위기를 보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시장에서 살아남고 승리하려는 집착이 탐욕과 과잉을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건설산업은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동시에 국민들로부터도 그리 따사롭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까? 건설의 위대한 에너지인 사랑의 의미를 떠올리고 그것을 토대로 기업 스스로의 사명과 비전을 챙겨볼 것을 권유한다.
“건설은 시장이기 이전에 사랑이다”라고. “그래서 건설은 위대하고, 영원하다.” 이 땅의 건설인들에게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