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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시론] 세월호 참사와 집단이기주의

보도일자 2014-05-19

보도기관 건설경제

한 젊은이가 칼라일에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칼라일은 “당신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리 되면 세상에서 악당 한 명이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세상을 개혁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점은 곧 양심의 회복일 것이다. 우리 모두 양심을 회복하면 세상은 개혁되고 밝아질 것이다.

 맹자는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보고 외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고,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말했다. 다만 혼탁한 세상을 살다보니 가려져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들 가슴 속 어딘가에는 양심이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관여된 사람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아마 이토록 많은 승객들이 수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다. 여객선의 안전 운항과 관련된 모든 단계의 책임자들이 하나같이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실종자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공직자들의 책임 회피적인 태도 역시 양심과는 한참 거리가 먼 행동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양심을 저버리게 하였을까.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으로서 인간은 얼마든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가 도덕성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간파하였다. 아무리 선한 인간성의 개인도 집단 속의 개인으로 있게 되면 극심한 이기주의의 행태를 보이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이기주의가 집단으로 뭉쳐 표출될 때는 훨씬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집단이기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평소에는 창피함을 느끼는 사람도 집단에 속하게 되면 곧잘 비양심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하게 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집단 속에서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내팽개치는 인간의 행동을 ‘악의 평범성’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상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독일 나치 장교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을 보고, 집단 속의 개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며 행하는 일들이 실로 엄청난 죄악이 될 수 있음을 고발했다.

 세월호 참사에도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집단이기주의가 작용했다. 무리한 증축과 과적을 일삼은 청해진해운이라는 기업집단의 부도덕한 이익 추구 행위가 여객선 침몰의 궁극적 원인이 되었다. 오로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승객의 안전이라는 기본 책무마저 무시해버린 결과가 이런 참극을 빚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장과 선원들의 비양심적인 행동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표출된 것이다.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국민의 신뢰를 잃은 재난대책본부와 해경 등 정부 조직의 무능하면서도 무책임한 행동들의 많은 부분도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하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익 추구를 위한 집단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다. 정당성과 선명성을 내세우며 투쟁하는 집단들은 그나마 힘이 없는 집단들이다. 돈과 권력 등에 기댈 수 있는 힘 있는 집단들은 보다 은밀하게 각종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그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 집단 간의 유착관계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해운사와 이들의 안전 운항을 감시하고 지도해야 할 기관과 단체들 간의 유착관계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관계의 정점에는 소위 ‘관피아’라는 관료집단이 있음도 밝혀지고 있다. 관료와 산하기관 및 유관단체, 그리고 기업들 간에 얽히고 설킨 유착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보이지 않는 정치 권력도 깊숙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정경유착이란 이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말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다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사회에서 정경유착이 심한 이유는 압축성장 기간 동안 형성된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련이 높다. 성장 지상주의와 결과 중심주의적 사고가 정경유착을 낳았다. 관행처럼 굳어져 온 연고 지향의 문화가 이를 보다 심화시켜 왔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법과 원칙이 경시된 저신뢰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사회문화 풍토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세상의 모든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익을 추구하는 관료집단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들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니버가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그는 “개인들에게는 이타심과 같은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 집단들에게는 오직 정의의 잣대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법과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도록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익집단들 간의 유착 가능성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사회의 기본을 지킬 수 있고,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건설산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