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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시론]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보도일자 2014-07-17

보도기관 건설경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가 있다. 필자는 고정 팬은 아니지만 우연히 화면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런데 실버 세대에 진입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이 프로를 즐겨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산속에서 독신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부러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가식 없는 행복의 모습일 것이다. 지독하게 아픈 상처를 지녔고, 그야말로 빈털터리인 그들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을 보면 고대 헬레니즘의 쾌락주의 철학이 떠오른다. 사실 쾌락주의만큼 오해받아 온 철학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은 감각적, 순간적 쾌락이 아니다.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 즉 마음의 평정이야말로 최고의 쾌락이라고 말했다. 쾌락주의 철학은 우리에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행복 해법으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인간의 행복에는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중 명성과 권력 따위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좋은 집과 쾌적한 목욕시설, 맛있는 음식 등은 자연스럽기는 하나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다. 반면 우정과 자유, 그리고 사색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들이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쾌락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가난하다고 반드시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려준다.

 <행복론>의 저자 알랭이 말하는 행복은 에피쿠로스와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그가 제시한 행복 실천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쓸데없이 머리를 싸매거나 끙끙대지 말고 몸을 움직이라. 걱정 따위의 정념에 사로잡힐 땐 팔굽혀펴기라도 해보라. 좋은 철학 선생은 아이들을 체육 선생에게 데려간다. 무엇인가에 집중한 사람은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 인간은 제 자신 말고는 적이 거의 없는 법이다.

 알랭은 행복이란 쓸데없는 생각 대신에 무언가 행동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는 당연히 고통이 수반된다. 그런데 이 고통에는 강요된 고통과 자발적 고통이 있다. 알랭은 같은 고통이라도 강요된 고통은 불행을 유발하지만, 자발적 고통은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등짐을 끙끙 메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퇴 후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행복하고 어떤 이는 불행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원생활은 집수리며 풀 뽑기 등 무수한 고통의 행위들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며 이를 즐긴다. 당연히 그는 행복을 만끽한다. 반면 전원은 좋지만 고통은 감수하기 싫은 사람도 있다. 이들에겐 집수리와 풀 뽑기는 강요된 고통이다. 더러는 남편은 좋아하나 부인은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전원주택은 불행의 터전이므로 하루빨리 도시의 아파트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제 산속 자연인들이 행복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은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삼시 땟거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저 하루 종일 일하고 움직인다. 그들은 모든 걸 다 잃고 나서 진정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운이 좋아(?) 많은 것들을 놓을 수 없는 우리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날 행복론의 대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통제권을 갖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수면 또는 TV 시청과 같이 수동적으로 즐기는 쾌락과는 상반된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면서 그로부터 자신이 성장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것으로부터 느끼는 행복감은 창의성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최고의 선은 곧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행복은 어떤 지위나 상태가 아니라 행동 그 자체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최고의 행복이 저절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행복을 찾지 말라는 말이 있다. 문득 돌아보면 행복했던 지난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지나왔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명예를 쌓는다고 행복이 비례하여 커지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