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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한국에 벡텔 같은 건설사가 없는 까닭

보도일자 2016-04-22

보도기관 매일경제

한국에서는 미국의 벡텔같이 탁월한 설계·엔지니어링 역량을 갖춘 글로벌 종합건설업체가 탄생할 수 없다.

이런 비관적인 단정을 하는 근거는 업무 영역에 대한 규제와 발주 제도에 있다. 설계·엔지니어링은 설계사와 용역사의 업무영역이지만 건설업체가 이 영역에 개입할 수 없도록 짜여 있다는 얘기다.

국내 건설업체들은 민간투자사업 외에는 인프라스트럭처(SOC) 운영사업도 할 수가 없다. 대부분 공기업의 영역이어서다. 철도 운영은 코레일, 물 관련 사업은 수자원공사가 담당하는 식이다. 신도시 개발이나 인프라 건설 기획도 마찬가지다. 국내 건설업체들이 시공에만 매달리는 이유다.

문제는 국내 시공만으로는 해외에서 입찰참가 자격조차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해외 철도사업은 `단일노선 30㎞ 시공실적`을 가진 업체로 입찰참가 자격을 제한하는 예가 많은데 국내에선 대개 10㎞ 안팎 공구를 분할 발주하고 있다. 10개 공구가 넘는 철도공사라도 1사 1공구 수주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니 건설사들이 전체 사업은커녕 몇 개 공구를 합친 규모의 프로젝트 관리를 할 기회가 아예 없다.

한 건의 공공공사를 건설사 한 곳이 단독 시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웬만한 공사는 최소 2~3개 이상의 건설사들이 공동도급을 해야 한다. 대표 시공사의 공사 지분도 대부분 50%를 밑돈다. 게다가 전기·통신공사는 반드시 토목·건축공사와 분리해서 발주해야 한다. 최근에는 공사용 자재도 공공 발주자가 직접 구매해서 주고, 하도급 대금도 직접 지불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외국이나 민간 건설시장에는 없는 시공 규제와 발주제도를 계속 확대해나가면 민간 건설업체가 설 땅은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그 와중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종합건설업체와 전문건설업체 간, 원도급자와 하도급자 간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민간 건설업체가 하던 일을 대신 하다 보니 공공발주자는 점점 더 비대해지고, 사업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젠 건설사들도 시공만 하지 말고 설계·엔지니어링 역량을 갖춰야 할 때다. 대형 건설사업 관리역량은 물론 자재구매력을 높이고 운영사업에도 참여하라고 오래전부터 떠들었지만 아직도 국내엔 설계-자재 구매-시공-운영 서비스를 모두 제공할 만한 글로벌 종합건설업체가 없으니 안타깝다.

이젠 정부 건설정책 초점을 중장기적 관점에서 건설업 구조개혁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둬야 한다. 그러려면 규제 프리존이 강화되어야 하고 규제 방식도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개혁해야 한다. 법·제도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것도 필수다. 과도한 법·제도와 규제로 신음하는 건설산업은 그런 개혁의 필요성이 더 크다. 물론 아직까지 건설 부문에선 이해관계 집단의 요구에 따라 약자 보호를 가장한 시대착오적인 규제 강화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젠 총선도 끝났으니 포퓰리즘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칸막이식 업역 규제를 혁파할 때가 됐다.

종합건설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업체를 탄생시키려면 발주제도 혁신도 시급하다. 가능성은 있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안에 처음으로 건설업체가 시공 이전 단계에 참여할 수 있는 발주방식을 시범 실시키로 해서다. 차제에 하도급자를 비롯해 건설사업 참여자 모두가 사업 초기부터 협력하거나, 시공과 운영을 통합 발주하는 등 다양한 발주 방식을 도입하고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국내 건설제도는 대부분 1970∼1980년대 산업화·고도성장·과잉수요·공급부족 시대에 탄생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융복합·저성장·수요부족·공급과잉 시대라는 새로운 현실을 맞닥뜨린 상황이다.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제도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국내에도 벡텔 같은 글로벌 종합건설사가 자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