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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버버리 사나이

보도일자 2006-02-16

보도기관 매일경제

오래 전 일이다.
버버리를 팔에 걸친 50대 중반쯤 되는 남자가 사무실로 찾아와서 느닷없이 "야,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

그 동안 왜 연락도 없었냐?"라고 인사를 하고는 알 만한 친구들 소식을 한참 떠벌리더니 "형편이 어려운데 얼마라도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린다.

나를 잘 아는 것 같아 거절하기도 어려워 가진 돈 얼마를 건네주었다.

버버리 사나이가 얼마 전에 다시 사무실을 찾아왔다.

지난번과 동일한 버버리를 팔에 걸치고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태도로 "야,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 . 그 동안 왜 연락도 없었냐?"라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온다.

순간 바로 그 버버리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똑같이 "야,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 . 그 동안 왜 연락도 없었냐?"라고 맞고함을 쳤는데…. 버버리 사나이, 깜짝 놀라더니 "선생님, 저를 잘 아십니까?"라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나도 따라서 "선생님은 저를 잘 아십니까?"라고 했더니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는다.

신세 타령을 하는데, 10년 넘게 이 일을 해서 자식 둘을 대학교육까지 시켰지만 동일인을 두 번이나 방문해 들통이 난 일은 처음이라고 한다.

사무실을 방문할 경우에는 동창회 명부나 인명록 등을 보고 사전에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오지만 보통 길거리에서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무나 붙잡고 반갑게 아는 체를 하는데 평균적으로 20% 정도는 성공할 확률이 있단다.

허물이 없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답답한 형편을 하소연하면 긴가민가하면서도 지갑을 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조금은 어리숙하고 정에 약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을 활용한 고지능의 신종 사기가 횡행하는 시대에 버버리 사나이의 60년대식 사기수법이 아직도 통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오늘은 또 어디서 낯선 사람을 잡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있을까? 길거리 어디선가 버버리 사나이를 만난다면 내가 먼저 "야,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같이 소주라도 한 잔 나누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