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육교- 경희궁과 경운궁을 아치로 잇다
보도일자 2011-03-07
보도기관 건설경제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당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을 감행한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바로 인근의 경운궁(慶運宮)을 수리했고, 어느 정도 공사가 마무리된 이듬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경운궁 태극전(太極殿, 즉조당)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법궁(法宮) 경운궁은 황궁으로서는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경운궁은 궁궐로 건립된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살던 집이었으나, 의주 몽진에서 환도한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부터 궁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정릉동행궁, 서궁 등으로 불리며 파란의 역사를 이어왔으나, 그 이후로는 왕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화강암 ‘쌍무지개’ 다리
1900년 1월 경운궁 궁장이 마무리되면서 고종은 경희궁(慶喜宮)에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 9년(1617) 창건된 경희궁은 이후 철종 대까지 이궁(離宮)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고종 즉위 초 경복궁이 중창되면서 버려진 궁궐로 남아 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이 황궁으로서의 위엄을 차리기에는 협소했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경희궁을 보수하여 한 궁궐처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시도가 바로 양 궁궐을 잇는 아치교의 건설이었다.
이 무지개 육교는 1901년(고종 38) 8월 폴란드계 독일인의 설계로 건설됐다. 2칸의 아치를 튼 ‘쌍무지개’ 모양의 이 화강암 육교가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육교였다. 기록이 남지 않아 여타의 제원은 알 수 없으나, 서대문로를 건너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아치 육교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교각의 일부가 러시아공사관 경내를 지났던 것으로 전해온다.
세계 첫 육교 이후 40년 만에
또한 남아 있는 사진을 살펴보면 육교 아래 아치로 전차 선로가 통했다. 고종은 아치 육교를 건설한 이후 경희궁 수리에 박차를 가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경희궁은 결국 철저하게 훼멸되고 말았다. 아치 육교 또한 철거당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교였던 이 무지개다리는 1861년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의 육교가 가설된 이후 40년 만에 건설된 것이었으며, 일본의 나고야(名吉屋) 육교보다는 58년이나 앞서 건설됐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법궁(法宮) 경운궁은 황궁으로서는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경운궁은 궁궐로 건립된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살던 집이었으나, 의주 몽진에서 환도한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부터 궁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정릉동행궁, 서궁 등으로 불리며 파란의 역사를 이어왔으나, 그 이후로는 왕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화강암 ‘쌍무지개’ 다리
1900년 1월 경운궁 궁장이 마무리되면서 고종은 경희궁(慶喜宮)에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 9년(1617) 창건된 경희궁은 이후 철종 대까지 이궁(離宮)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고종 즉위 초 경복궁이 중창되면서 버려진 궁궐로 남아 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이 황궁으로서의 위엄을 차리기에는 협소했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경희궁을 보수하여 한 궁궐처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시도가 바로 양 궁궐을 잇는 아치교의 건설이었다.
이 무지개 육교는 1901년(고종 38) 8월 폴란드계 독일인의 설계로 건설됐다. 2칸의 아치를 튼 ‘쌍무지개’ 모양의 이 화강암 육교가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육교였다. 기록이 남지 않아 여타의 제원은 알 수 없으나, 서대문로를 건너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아치 육교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교각의 일부가 러시아공사관 경내를 지났던 것으로 전해온다.
세계 첫 육교 이후 40년 만에
또한 남아 있는 사진을 살펴보면 육교 아래 아치로 전차 선로가 통했다. 고종은 아치 육교를 건설한 이후 경희궁 수리에 박차를 가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경희궁은 결국 철저하게 훼멸되고 말았다. 아치 육교 또한 철거당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교였던 이 무지개다리는 1861년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의 육교가 가설된 이후 40년 만에 건설된 것이었으며, 일본의 나고야(名吉屋) 육교보다는 58년이나 앞서 건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