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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부산 영도다리- 최초의 연륙교②

보도일자 2011-03-22

보도기관 건설경제

선개교는 피벗(pivot)을 중심으로 수평면 안에서 교체를 좌우로 회전하여 여닫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압록강철교와 호주 시드니의 피어몬트브리지(Pyrmont Bridge, 1902) 등이 대표적이다. 승개교는 교각 양쪽에 주탑을 세우고 그 상부에 도르래를 달아 와이어로프로 교체를 끌어올리고 내려서 여닫는 방식이다. 교체의 무게는 추(錘)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강 반포대교의 아래 층 다리 잠수교에 크레인으로 15m 정도를 들어 올리는 승개장치를 설치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강(Sacramento River)의 리프트브리지(Lift Bridge)와 미네소타의 에어리얼리프트교(Aerial Lift Bridge) 등이 대표적이다.

전개교는 롤러 또는 바퀴로 교체를 수평 방향 육지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실제로 건설된 예는 거의 없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영도대교는 육지 쪽 31.3m를 도개교로 설계하여 1,000톤 급 선박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 형교로 건설되었다. 다리 전체의 면적이 3,948m2였고, 도개하는 부분의 면적이 1,044m2였으니 다리 전체의 1/4(26.4%)을 여닫았던 셈이다. 도개 속도는 1분 30초~4분이었으며, 그 동력은 22마력이었다. 이 다리가 개통되던 날 ‘하늘로 치솟는다’는 도개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경남 일원에서 6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하며, 그 이후 하루 6번씩 도개하면서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영도의 땅값도 하루아침에 3배가 올랐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영도다리에는 이 민족의 서러움과 애환과 향수가 투영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혹은 피난지에서의 생활고를 비관하던 적잖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바다에 몸을 던졌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잠깐만’이라는 팻말을 붙였고, 경찰관을 배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초생달만 외로이 뜬’ 그래서 더욱 처연했던 피난지 부산의 ‘영도다리 난간’에는 수많은 이들의 망향과 회한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고(故) 현인이 부른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철거… 옛 모습 그대로 복원키로

개통 이후 32년 동안 다리를 여닫았던 도개교 영도다리는 1966년 9월 1일부터 날개를 접어 그 가동을 멈추면서 고정교로 전환되었다. 폭주하는 교통량과 다리를 따라 가설한 수도관, 노후화된 도개 시설 등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1980년 1월 새로운 연륙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다리의 공식 명칭이 영도대교로 바뀌었다. 개통 이후의 공식 명칭 부산대교는 새 다리(1976년 10월 착공, 260m, 88억 8,900만원)에 넘겨주었다. 부산시민들이나 온 국민들에게는 언제나 영도다리였기 때문이다. 2008년 7월에는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세 번째 연륙교 남항대교(1.925km, 3,550억원)가 건설되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CERIK) 연구위원  <한국건설기네스(Ι)길> (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발췌ㆍ정리